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문단 편집) === 최후 === 1979년 9월 29일 정오에 열린 군사재판에서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응게마 정부의 구성원 6명[* 전직 부통령 1명, 수용소 소장 2명, 응게마의 경호원 2명, 경호실장 1명. 이들 중에는 미겔 아이게 은투투무 전 부통령과 살바도르 온도 엘라 블랙 비치 전 교도소장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현직 부통령이자 마시아스 응게마의 사촌이던 보니파시오 응게마 에소노 은차마(Bonifacio Nguema Esono Nchama, 1936~2015. 이전에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는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는데, 이는 에소노 은차마가 오비앙의 쿠데타 후에 마시아스 응게마를 버리고 재빨리 오비앙의 적도 기니 최고군사회의에 빌붙은 덕이었다. 이후 은차마는 마시아스 응게마의 처형 후 독립훈장 대십자장을 수여받고 에티오피아 주재 대사, 몽고모 시장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는 듯 싶었다가 오비앙에게 [[토사구팽]]당하자 1990년에 스페인으로 망명했고, 1995년에는 다른 전직 정부 인사들과 함께 야당인 공화당 민주군(FDR)을 창당했다가 오비앙의 탄압을 받았으며, 2015년 4월 14일 고국으로 돌아왔다가 13일 후인 동월 27일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갔다가 의문의 [[의료사고]]로 사망했다.(가족들의 말로는 "의사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적도 기니 정부의 저명한 인사가 남긴 말에 따르면 오비앙의 소원 중에는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시대와 내 정부 초기 몇 년 동안 내가 저지른 모든 살인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보다 먼저 죽지 않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오비앙은 소원을 이루긴 했다.]과 함께 사형과 재산 몰수를 선고받게 되는데, 이 재판에서 다른 피고 2명은 징역 14년형, 또다른 피고 2명은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검사가 구형한 형량보다도 더 많은 형랑이었으며, 이 재판의 판사들은 응게마에게 사형 선고를 무려 101번이나 내렸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 마지막 재판에는 14년형을 선고받은 피고 2명만 참석했다. 이후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들은 1명 빼고는 모두 1981년 7월 사면되었다.] 마지막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응게마는 사형당할 것을 예감하고는 감방에서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리고 몸을 떨먼서 흐느껴 울었지만, 사형 선고를 받고는 완전히 체념하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선고 후 가톨릭 신부가 [[고해성사]]를 하자고 하자 '고백할 것이 없다'고 했고, 처형장에 갈 때에는 당혹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굴을 가렸으며, 처형 직전에는 거친 목소리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가족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응게마의 판사 탄압의 여파로 적도 기니에는 사실상 상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급 법원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재판의 단심 판결은 최종 판결이 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7명은 살바도르 온도 엘라를 빼고는[* 선고 당시 일흔을 넘긴 노인이었기에 형 선고 거의 직후에 오비앙에 의해 사면되었고, 1982년에 몽고모 지역의 정부 대표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같은 날 오후 6시에 모두 총살당했다. 처형 집행 당시에 응게마는 '조용하고 위엄이 있게' 있었다고 한다. 응게마가 마법을 쓸 줄 아는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믿었던 적도 기니의 군인들은 공포에 떨며 그를 죽이기를 꺼렸기 때문에 모로코인 용병이 그의 처형을 대신 맡아야 했는데,[* 이 인연(?) 덕인지 오비앙은 대통령 경호원을 자국민이 아닌 모로코인 용병으로 뽑았다.] 이렇게 처형된 6명의 시신은 이들을 쏜 모로코인 용병들에 의해 트럭에 실린 후 처형장 근처의 공동묘지 근처에 큰 구덩이를 판 후 이 구덩이 안에 비문은 커녕 그 어떠한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이렇게 아프리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는 [[인과응보|악행에 걸맞는 참으로 초라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보다 아주 약간 나은 수준의 독재자였던 [[폴 포트]]도 부하들에 의해 폐타이어, 쓰레기와 함께 화장되었다.] 한편 응게마에 대한 최종 판결이 국민들에게 전해지자, 적도 기니의 사람들은 당시 이를 지켜본 스페인 사람들이 '장기간의 천둥'이라고까지 표현했을 정도로 엄청난 환호를 했으며, 사람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얼싸안고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응게마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당연히 모든 적도 기니의 국민들은 '광기'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응게마의 처형을 널리 축하했다. 이후 응게마가 쫓겨난 8월 3일은 적도 기니에서는 '자유 쿠데타의 날'이라는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테오도로 오비앙은 이 날을 '나라를 구한 날'로 기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시아스 응게마를 피해 외국으로 돌아왔던 주민들도 악마와도 같던 독재자가 처참하게 몰락하자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해 1982~1983년 무렵에는 마시아스 응게마 집권 이전의 인구 수치를 복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삼촌을 몰아낸 조카도 정작 집권하고 보니까 삼촌보다는 낫긴 해도 극도의 인권탄압과 부정부패를 저지른 악랄한 독재자였으며,[* 실제로 이 쿠데타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숙청되어 구금된 것을 넘어 처형당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집권 44년 차인 [[2023년]] 현재까지도 권력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또한 한동안 적도 기니 주민들 사이에서는 "조카가 삼촌을 처형한 후 '도살'하고 먹었다"는 끔찍한 루머까지 돈 적도 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오비앙에 대한 원성도 컸다는 말이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